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노리코의 식탁 紀子の食卓 Noriko's Dinner Table 2005
    Cinema/Japan 2007. 12. 19. 20:08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紀子の食卓
    사용자 삽입 이미지
    Director 소노 시온
    Cast Noriko 후키이시 카즈에 Tetsuzo 미츠이시 켄 Yuka 요시타카 유리코 Kumiko (Ueno54) 츠구미
      보통의 일본코믹물 또는 요리에 관련된 영화인 줄 알았던 노리코의 식탁은 무시무시한 영화였다. 무려 2시간을 훌쩍 넘기는 러닝타임안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삶에 대한 다각적 접근과 정체성에 대한 의문에 대한 상상력으로 꽉짜여진 치밀한 전개, 이 영화는 삶에 대한 인간의 역할과 진정한 행복이란 존재할까에 대한 의문이 아닐까 싶다.

       전체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비현실적인 현실을 비추는데 근본적으로는 소통과 관계에 대한 무의미성 또는 허무함에서 출발하고 있다.

       노리코의 가출, 아버지의 천국인 시골 토요카와에서 살아 간다는 것. 나이가 들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아버지와의 교류가 불가능한 시점에서 노리코가 선택하는 것은 나름의 반항이지만 말 그대로 결과가 정해져 있는 반항으로 그치고, 유일한 탈출구이자 소통의 대상인 우에노역 54라는 아이디를 만나러 도쿄로 간다. 어릴적 친구인 미칸짱처럼 스스로 서고 싶어한다. 코트소매의 실밥을 탯줄 삼아 노리코는 미츠코로 다시 탄생하게 된다.

       유카의 실종, 언니가 사리지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일상. 이해할 수 없는 언니라는 존재의 실체에 조금씩 접근하면서 유카는 아빠와 언니 그리고 자신, 엉마 소통되지 않는 관계를 직시하려 한다. 언니가 남긴 흔적을 찿아가던 중, 동경에서 벌어지는 희대의 엽기 여고생 54명의 지하철 집단 투신. 유카는 노리코의 흔적을 통해 그 실체를 짐작하고 만약 자신이 사라진다면이라는 시물레이션을 한다. 자신이 사라지면 아빠가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들을 찾으려고 노력할 부모를 시물레이션한다. 그리고 딸들에 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아빠를 상상하는 듯. 어쨌던 그녀 또한 사라진다. 아마도 그녀 또한 폐허닷컴을 통해서 노리코를 따라서 사리지는 것이다.

       노리코는 쿠미코를 따라다니며 가족대여산업 즉 일종의 실생활 롤플래잉을 연기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저 그녀에게 남은 미츠코라는 정체성을 간직한 채,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도구가 되어 버린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가족의 정, 사랑, 감정들을 느끼면서 더 이상은 노리코가 될 수 없음을 느낀다.

       쿠미코는 오래전 지하철의 사물함에 버려졌던 일명 "Coin Locker Baby", 그녀의 삶에서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추억을 위조하고 삶을 위조하면서 쿠미코라는 위장을 만들어 간다. 그녀에게 의미를 가지는 것은 추억이라는 기억의 형태로 저장되어지는 이미지일 뿐이다. 타인의 추억과 희망을 대여해줌으로써 불완전한 자신을 온전케 하려는 것이다.

       아빠는 딸들을 찾아 헤메면서 연쇄 자살 사건과 자살클럽의 존재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자신의 이상향이었던 토요카와는 더 이상 고요한 천국이 될 수 없다. 유카의 시뮬레이션과늘 달리, 그는 바로 직장을 그만 두지 않는다. 딸들의 부재는 그릴 힘들게 할지언정 천국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자살은 모든 것을 허무로 인식케하고 자책과 과거에 대한 집착을 낳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카의 예상처럼 그는 딸들과의 관계를 정의할 수 없게 된다. 아는 것이 없는 것이다. 남은 것은 미련과 집착 그리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근거없는 희망.

       아빠는 결국 그들을 찾아내고 역할 놀이를 통하여 모든 관계를 되돌리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은 너무 변해 있다. 파국만이 남은 것인다. 피내음 자욱한 잔혹극을 거쳐서 그들은 가족을 연기하고 다시 출발할 것을 다짐하지만 그것은 과거를 향한 출발도, 과거에서 출발한 시작도 아니다. 다만 또 다른 연기일 뿐인 것이다.

       어쨌던 노리코는 집으로 돌아오지만 아버지는 과거의 아버지가 아니고 엄마는 타에코가 아닌 쿠미코이다. 그녀가 원하던 새로운 출발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카는 노리코가 입고 가출했던 코트의 실밥을 마찬가지로 탯줄 삼아 영에서 다시 시작하고자 떠난다.

       줄거리의 전개에 따른 간략한 느낌만으로도 짧지 않은 이 영화는 의미심장하다고나 할까 애매하다고나 할 그런 영화이다. 어디가 진실인지 어디가 망상인지를 알 수 없는 몽환적 소녀성장일기는 인간관계의 허구성을 다루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게 한다.

       나는 나와 관계하고 있는가? 나는 나와 소통하고 있는가? 타인과의 소통이나 관계를 역할에 따른 행위 즉 연기로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소통의 부재와 몰이해 또는 무의지에서 파생되어지는 정체성의 파괴이다. 아니 정체성의 규격화에 따른 파격의 등장을 부를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과정에서의 결과로 인간은 희망과 행복을 상실하고 그것을 연기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최소한 그 연기 속에서는 행복을 느끼는 듯 하니까말이다. 행복한 죽음을 연기하며 죽음을 맞이하고, 죽는 것을 연기하는 것이다. 기쁘게 죽음을 맞이한다. 가능하다면 그 이상의 것은 없을지도 모를 기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것의 의미를 알수가 없는 상실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역할놀이 속에서만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은 회복하거나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이고 그것이 현대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이 잃어버린 것은 과연 무얼까? 되찾을 수 없어 연기해야만 가능한 행복을 원래 가능케 했던 요소.

       아마도 그것은 소통에 따른 관계를 오인하면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노리코가 아빠를 이해했다면, 아빠가 노리코를 이해하기 위한 소통이 가능했다면. 인간은 다양한 측면을 볼수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바라보는 것이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맹목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일런지도.

       글이 쓰잘데기없이 비비 꼬인 듯 하지만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은 현대는 역할 놀이로 위장되어진 세계이며 기만으로 지배되는 세상이라는 것 아닐까? 자신을 찾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고 또 다른 이름을 가져야만 한다. 모든 것은 조작되어진 기억으로 대체 가능한 프로그램 속의 바이너리 코드의 010101010101010에 볼과 하다는 걸런지도..

       어쨌던 생각할 거리를 치밀하게 던져주며 추리, 추적, 성장, 사회, 가족, 정체성 등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한 일면을 제대로 조명하고 있는 영화라 여겨진다. 그러나 영화가 많이 길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나는 나와 관계하고 있는가?



      2002년의 자살서클Suicide Club (film) wikipedia의 후편격이라고 할수 있다고 한다.

    Trailer
    Reference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