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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번째 사랑 Never Forever 2007
    Cinema/Korea 2007. 11. 1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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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해 최고의 한국영화는 무엇? 이라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그 동안은 딱히 꼽고 싶은 영화를 떠올리지 못했고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말을 돌리며 아마도 대답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2007년 들어 지금까지 본 영화 중 그래도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들어보라면, 조금은 실망스러웠던(상대적으로) 이 창동의 밀양 密陽 을 들 수 밖에 없으리라는 정도로 생각했엇지만,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이 작품 "두 번째 사랑"이며 밀양만이 이에 근접한 퀄리티를 가지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물론 내가 본 중에). 물론 상대적인 기준이며, 밀양이 이 창동의 작품이 아니라면 말을 바뀔 수 도 있다.


      내가 어떤 작품을 비평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마음에 들었던 부분들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두 번째 사랑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 진아
    베라 파미가
    Vera Farmiga ... 소피
    하 정우 ... 지하
    데이빗 맥킨니스 David McInnis ... 앤드루
    두 번째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인 영화이다.


      소피와 앤드류는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부부, 그러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 치르는 격정적인 사랑을 통해 드러나는 그들의 아픔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에서 파생되는 아픔들. 너무나 믿음에 충실한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진 가족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만이 이루어 진다 믿으며 간구해보지만, 그 기도에서 조차 소피는 소외를 느낀다. 기도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한국식의 구복신앙 식 기독교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바라고 구하라 그러면 얻어질 것이다
    란 말에 너무나 충실하기에 그들이 구하는 것은 바램 그 자체이지, 하나님이 아닌지도. 아니 이건 내 생각이고 소피는 익숙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화목이 전부이다. 그리고 자식을 원하는 모든 시선 속에 숨막혀 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지를 통한 어떤 구원은 공허하기만 할 뿐이다.

      지하는 불법체류자. American Dream을 꿈꾸며 뉴욕에서 빌빌거리고 있지만 어느새 여권은 만료된 채 "불체"라 불리며 저임금에 시달리며 그야말로 바퀴벌레처럼 생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공원 한 귀퉁이에 자신만의 서낭단을 만들어 바라는 바를 기도하고 힘든 현실을 깨달을 뿐이다.

      이 대조적인 환경의 두사람을 통해서 느껴지는 신앙은 바램이며 소원의 기원일 뿐이다. 아니 소피에게는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 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사람에 치이고 있을 뿐이며 하나님은 그녀를 구원하지 못한다. 단지 그녀의 주위에서, 기독교의 구복신앙적인 면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지하 역시 마찬가지이다. 믿어서 돌무더기에 기원한다기 보다 힘든 현실에 유일하게 기대고 있는 것이 돌무더기로 이루어지는 서낭당일뿐이다.

       앤드류와 지하가 소피에게 각각 기도를 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식탁에서 앤드류가 소피에게 설명을 하고, 공원의 돌을 쌓아놓은 이유를 설명하는 지하의 모습에서 소피가 느끼는 것은 결국 같은 것일런지도.

       같은 듯 보이지만 또 다러기도 한 두 개의 바람은, 이후에 언급하게 될 한장의 그림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 여겨진다. 돌덩이에 바래던, 하나님에 바래던 그들의 바램이 하나를 지향하는가 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면 말이다.

      이 두 사람이 불임크리닉에서 만나면서 그들의 바램은 구체화된다. 소피의 선택에 의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생기는 것이다. 그들의 어떤 믿음과도 상관없는 필요에 의해서이다. 단지 돈이 필요했고 아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불가능한 기도에의 기대보다는 현실적 대안이 필요했고, 얼마의 돈이 더욱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종교는 현실을 위로할 뿐이다. 구원은 위로받기 위한 이들의 소망일 뿐이라는 것 아닐까? 행동하지 않는 종교, 기복신앙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모든 것을 하나님에 책임전가가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니 따를 뿐이라는, 스스로 깨끗해진 채 무책임하게 자신들의 군주를 욕되게 하는 것 아닌가?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이러한 점들에서 종교의 한계를 명백히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사랑은 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자는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고, 남자는 여전히 고국에 있는 애인의 사진을 머리맡에 두고 있지만, 그들의 비즈니스적 관계는 조금씩 진전을 한다. 각자가 느끼던 고독이 가장된 행복과 희망을 뚫고 표면으로 드러난다. 그들의 관계가 계약의 경계를 넘어서고서야 여자는 바래마 지 않던 임신을 하게 된다.

      사랑의 결실은 무의미한 것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이야기다. 소피가 임신으로 인해 바라마 지 않던 주위 사람들과의 화목한 관계와 행복을 얻어내지만 이제 그것으로 인해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자신이 바라던 것이 위장된 허구의 세계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하를 찾아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려고 한다. 지하의 방에 걸린 해변의 그림이 함께 바라볼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결과만을 바라는 무의미한 일상과 과정이 결국은 허무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상실했던 것이 바로 사랑임을 깨닫는 것이다.

      지하의 경우에는 오히려 솔직하고 현실적지만 또한 비현실적이다. 불법체류를 하면서 너무나 힘겨운 판에 드리워진 구원의 동아줄이 소피인 셈이다. 현금의 유혹에 스스로를 자조하며 팔고, 외로운 가운데 나타난 여인을 그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의 사랑은 절실할 수 밖에 없고 필연일 수 밖에 없다. 비현실적이란 말은 그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가지고 있는 건 그가 소피를 임신시켰다는 사실뿐이다. 지하가 소피에게서 무언가를 얻는 방법은 영화에서처럼 서로가 사랑을 해서 이루어지는 방법이 가장 무난하고 작품의 흐름에도 맞기는 하지만 조금은 너무나 평이한 진행이 약간은 아쉽다. 그렇다고 어떤 대안도 존재치 않는 최적의 선택이다.

      두명의 주인공을 내세우긴 했지만 이 영화에서의 사랑은 소피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녀가 사랑을 새로이 깨닫는 과정을 그리고 있기에, 따라서 지하의 사랑에 관한 묘사가 부족함이 약간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기도 하다. 소피가 사랑을 얻기 위해서 표피의 행복을 깨고 현실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두번째 사랑이다. 그녀가 막연히 얻으려고 했던 아기는 목표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상징하는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아기를 얻으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기를 얻으면서 아기를 키우면서 사랑은 마찬가지로 자라난다는 점에서 말이다.
    두 번째 사랑은 미국의 여인을 소재로 한 현대적 씨받이의 재해석이며 깊고 푸른 밤의 변주곡이다.


      아이에 목매다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미국 속의 한국을 비추어내고 있다. 남아 선호라던가, 그런 것을 전면적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앤드류의 자살시도와 그들이 보여주는 아이에의 기대는, 자식을 얻기 위해 씨받이를 구하는 이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배경과 사건을 통하여 소피와 지하의 불임클리닉을 통한 만남을 당위성 있게 한다.

      그리고 임신을 너무나 축복해주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피로 이어지는 혈연을 중시하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입양과 같은 다른 선택을 거부하는 핏기어린 아집의 한계이다. 이 부분에서 기본적으로 동서양이 다르다고는 여기진 않지만, 일단 우리 영화고 가족구성원들의 기대에 비추어 우리의 모습을 떠 올릴 수 밖에 없다.

       씨받이의 재해석이라 굳이 표현한 것은, 별 다른 이유보다 그냥 떠오른 생각인데, 영화에서의 모든 선택의 주체가 소피라는 점 때문이다. 상황에 끌려가긴 했지만 또 쫓기기도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얻으려고 하는 것을 스스로 얻어낸다.

      깊고 푸른 밤을 떠올리는 것은 불법체류라는 형태의 극복이 필요한 그린카드 때문었는데, 현실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지하가 비열해지는 방법을 통하여 그린카드를 얻어내는 방법이다.

      물론 극 중에는 그린카드가 언급되지 않고 마지막 장면을 통하여 전후 사정을 짐작한다면 결국은 사랑이 결실을 맺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해석이라는 의미는 깊고 푸른 밤에서의 어떤 욕망이 파멸로 치달아가는 가는 주된 이유가 위장된 사랑의 결과인 것과 대조적인 면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드럽고 어찌 보면 잔잔한 감정의 흐름을 따라 이루어지는 사랑의 결과를 보여주면서 정답은 사랑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번째 사랑은 희망이란 스스로 선택하고 가꾸어 나가는 것이며 삶이란 두 사람이 함께 바라보는 것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종교적인 허울과 사랑이란, 삶이란 무엇인가를 자문하게 하는 이 영화는 마지막의 해변장면에서 보여지는 한 없는 따뜻함에 눈을 부시게 한다. 허름한 방에 걸려 있던 그림의 공간이 현실이 되며, 파도가 지나간 웅덩이에 갇혀 있는 물고기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작은 손이 풀어주는 커다란 자유와 희망을 느끼게 해준다.
      올해 봤던 영화 중 인상 깊었던 엔딩은 역시나 해변장면이며 그 강렬함에 전율했었던 영원한 여름 盛夏光年의 마지막 장면인데. 이 영화는 임팩트는 그보다 못하지만 활짝 웃는 소피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두 번째 사랑이라는 타이틀이 올라오며 떨어져 나가는 "두 번째"라는 단어. 남는 것은 사랑 뿐이다.
      영화의 내용 언급에 치중한 나머지 영상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마치 거친 유화를 보는 듯한 색감과 또 다른 느낌의 영상이 가지는 질감의 차이를 통하여 전개되는 인물들의 감정선, 낭비되지 않는 화면의 구성을 통하여 작품에 흐르는 들쭉날쭉해 보이는 영상들이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루며 전개되고 있는 듯하다. 영화용어나 영상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화면에서 보여주는 영상미가 그 자체만으로는 조화를 이루지 않지만 내용과는 완벽하게 일치하며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 낸다는 의미이다. 젠장 내가 적어 놓고도 무슨 말인지 ㅜㅜ

      어쨌던 글이 꽤 길어졌고 중구 난방이지만 올해 본 우리 영화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이다. 최고니 어쩌니 하는 말은 의미가 없지만 개인적으로 그 말을 감히 붙여 본다 베라 파미가의 연기는 꽤 연기를 잘 해낸 하 정우를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뛰어나다.
        그런데 저 포스터의 카피 꼬라지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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