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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 密陽 Secret Sunshine 2007
    Cinema/Korea 2007. 8. 2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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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스런 햇볕은 삶의 희망? 교회의 허상?


    AKA: Secret Sunshine
    密陽

    감독:이창동

    신애: 전도연
    종찬: 송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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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동, 전도연, 송강호 이 세명의 이름만으로도 한국영화를 일부분 정도는 가뿐히 대표할 수 있는 지명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칸느 영화제 여우 주연상에 빛(?)나는 전도연, 오랜 외도 후 영화계로 돌아온 이창동 감독, 송강호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치 않을 정도의 위상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당연히 기대가 클 수 밖에 없는 영화. 그 동안 어떤 스포일러나 작은 정보도 접하지 않느라 신경을 썼지만 그런 노력을 하찮게 할 정도로 영화를 보는 것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그것은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과 편견에서 비롯될 수 밖에 없었다.

    줄거리는 more에

    영화를 보게 된 시기가 조금은 미묘할 수 밖에 없고,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는 이해의 소지가 다분할 듯 하다. 왜냐하면 아직도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지지부진하고 더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제 조금씩 잊어버리고 있는 듯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특정종교에 대한 비판은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러한 시각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단 기독교적인 시각을 제하고 먼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일단 종교를 배제하던 아니하던 영화는 신애 개인에게 집중할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왜 신애는 밀양으로 내려왔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신애 본인은 인정하지 않지만 남편이 불륜을 행했으며 이후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살러오는 신애의 모습은 이미 정상적인 사람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종찬에게 그녀가 설명하는 밀양의 어원은 密 + 陽 = Secret Sunshine 비밀스런 햇볕이다. 陽은 또한 남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아들 준의 이름은 6월이다. 6월의 태양은 여름의 초입으로 달궈지기 시작하는 아직은 따가울 정도는 아닌 정도의 볕을 비추고 있을 때이다

    신애는 남편의 불륜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 배신감에 모멸감을 더하고 있는 상태로 이해했다. 따라서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남편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을 데리고 내려오는 것이 아닐까? 남편과 아들은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릴때 결혼하면서 포기했던 자신의 인생이 남편의 상실로 인하여 송두리째 부정되는 것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앗아간 남편의 흔적을 따라감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되찾으려 하는 것이다. 아들 준 또한 어떻게 보면 그 도구이며 밀양의 또다른 이름일 수 있으리라.

    그러한 신애에게 있어 새로운 밀양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아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들을 영원히 잃어버림으로써 신애의 모든 인생은 엉망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들을 통하여 이루려고 했던 자신의 존재가치 확인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제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고독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녀의 앞에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난다. 하나님에게 구원을 바라고 기도하고 울부짖고 자신보다 더 불행해 보이는 모습들을 보면서 신애는 아들의 존재를 하나님으로 치환시켜버린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의 문제인 것이다.

    그녀는 행복하다. 구원을 받았다고 믿으면서 행복하다는 착각을 하게된다. 스스로 거듭 났다고 믿으며 올곧게 설 수 있음을 마냥 기뻐한다.

    신애는 스스로 피해자라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며 이제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 행복을 느끼는 것은 그 당연한 보상이며 혜택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래서 그녀는 빛나는 유괴범의 구원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듣고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원한 것은 공평한 신이 아니다. 자신만을 아껴주는 특별한 가치를 내려줌으로써 자신을 완전케 하는 충족감을 원한 것이다. 유괴범에게도 공평한 신, 자신은 이렇게 괴로움을 거쳐 구원 받고 행복을 느끼게 되었는데, 유괴범은 아들을 죽이고 감옥에서 하나님을 접하고는 구원받고 스스로 용서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받아 들 일수가 없는 것이다.

    신애는 미쳐버릴 수 밖에 없다. 이미 자신은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없는 무의미한 존재에 불과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제 신애에게 신이란 도구는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더구나 이제는 아들이라는 희망조차 꿈꿀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배신하고 속인 남편과 다름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신애가 원한 것은 자신의 힘으로 존재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남에게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이전에 남편이 했었던 역할을, 밀양, 아들, 하나님의 순서를 거치면서 절망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꽤 중요해보이는 종찬은 그녀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정작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종찬 하나뿐인데도 말이다. 종찬과의 교감은 신애가 마지막 머리를 자를 때의 단 한 순간에 불과하다. 이제 그녀는 타협하게 된 것이다. 스스로의 머리를 자르고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그녀는 하나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혹독한 고난을 거친 후에야 결국 스스로 서야만 하는 존재임을 말하는 듯 하다. 인간은 원래 그런거다. 소통하면서 살아가고 관계속에 기생할 수 밖에 없지만 본질적으로 홀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디까지나 본질 적인 부분이다. 신애가 찾는 것이 스스로의 존재가치였기에 이렇게 한정해서 생각해봤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의 가치추구 문제로 한정짓는 다면 후반부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교회의 모습은 설명할 수 없기에 종교적 문제를 피해갈 수 가 없다.

    솔직히 이 부분은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그럴수 없는 부분이다. 밀양은 기독교의 허상을 짚어가는 영화이며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었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 이 부분에 있어서 난 밀양을 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묘사되는 교회의 어떤 모습들에서 느껴지는 광신의 광기에 노출되기가 싫어서였다.----

    피아노 교습학원 맞은 편 약국 장로부부의 모습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그 이중적이며 표리부동한 모습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난 기본적으로 기독교인들의 내가 감히 흉내내기 힘든 그 묘한 말투와 일방적 논리에 무조건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약사가 신애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을 언급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기독교인들이 전도하는 사람들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대부분 내외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목표가 된다. 모든 것을 갖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한다. 일단 울타리에 들어가면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의지이며 시험이니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써 극복해야만 한다는 논리이다. --- 영화를 보면 처음 신애는 약사의 전도행위에 완곡한 거부를 하게 되는데, 그녀를 남편 잃고 시골에 내려온 마음에 상처를 입은 전도대상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들이라는 훌륭한 대상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불가능했다.

    이러한 그녀가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바로 아들의 상실외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절망한 그녀가 구원의 플래카드를 보고 찾아간 곳은 울고 흐느끼는 기독교인들의 부흥회의 현장이다. 이미 더 이상 흐느낄 울음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녀지만 마음껏 비명지를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이러한 점은 비판이나 비난의 대상은 솔직히 아니다. 미쳐가는 이가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수단으로써 훌륭하게 기능하는 종교의 본래목적에 가장 부합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신애는 행복을 느끼며 믿음을 수행한다. 아들의 상실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주장하는 어떤 부분들을 보면 자신을 낮추고 항상 천하게 여겨야 한다고 한다. 스스로를 잊어야만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구원을 받고 죄사함을 받으며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애는 자신을 전도하던 약사에게 말한다. 하나님이 있다면 왜 내 아들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고? 약사의 대답은 얼버무림일 뿐이다.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원인과 결과가 있고 더 큰 것을 내리시기 위한 행위의 일환일뿐이라는 것이다.어쨌던 절망에 빠졌던 신애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사함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으며 거듭난 상태가 되었다. 단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인 절박함을 느낄 수 밖에 없긴 하지만.

    여기에 종찬의 신애로 인한 교회활동은 교회가 내포하고 있는 또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말들 하지 않는가? 중고등학교때 여자 만나러 교회간다고들 하는 그런 류의 말들. 그는 딱 그런 목적으로 간다. 더도 덜도 아닌 딱 신애꼬시기의 일환일 뿐이다. 그에게 믿음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바로 교회를 다니지만 믿음이 없는 이들라는 모순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말은 나중에 그가 다시 못을 박는다. 아직도 교회다니냐는 물음에 처음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그냥 안 나가면 허전하고 가면 마음이 편해서 간다는 것이다. - 교회로 봐서는 엉터리 신자일런지 모르겟지만 내가 봐서는 종교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

    신애가 믿음을 버리는 계기가 되는 유괴범의 면회.(난 이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아들을 죽인 살인범과 피해자를 만나게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는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원초적 질문의 하나이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를 실천하여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유치함이 하나이고 자신의 모든 죄를 믿음 하나만으로 죄사함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의 정의는 무었인가 하는 것이다.
    예전에 내가 잠깐 교회와 연을 맺었을 때도 가장 먼저 물었던 질문이 이것이었다. 구원만 받으면 모든 죄는 사해지는 가?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10초후에 하나님을 믿으면 내 죄는 없는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때 그렇다는 대답을 들었다. 당연히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하나님만 믿으면 장땡이냐? 방금 저지른 모든 죄를 단지 믿음만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래전이라 기억은 흐릿하지만, 믿는 자는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하는 메아리 뿐이었다. 그럼 과거의 종교전쟁은 뭐고? 마녀사냥은 무었이며? 성경책에 손 얹고 취임선서하는 원새이들의 가공할 죄악은 뭐지라는 의문은 접어둘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연을 맺었던 곳은 그래도 나름대로 논리적인 부분이 정연하긴 했지만 독실한 믿음(나는 광신이라고 읽는다)을 장려한다는 것에는 별반 다름이 없었다. --- 어떤 기독교인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내 의문은 쉽게 답이 나오기도 한다. 기도에 항상 나오는 말이 내 죄를 용서해주시옵고....라는 말이다. 매일 지은 죄를 씼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라고 이해했었다. 그리고 여기에 오류가 있는 것이 내가 잠깐 연을 맺었던 곳은 그런 논리적 오류를 범하진 않지만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였다고 성경에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죄가 없는 것이다. 주께서 내 죄 사하셨네라는 내용의 찬송을 한 직후에 내 죄를 사해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성경에 이미 예수께서 모든 죄를 사하셨다는 성경을 읽은 후에 또 용서를 구한다. 그들은 자신의 성경조차 제대로 믿지를 않고 있는 것이다. ---아 이부분에 대해서는 성경속의 죄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죄이고 인간기준의 죄는 다른 것이라는 이유(변명)를 대기도 한다. 이해가 갈듯 묘한 둘러치기였다---.

    신애가 시험(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내리는 고난)에 빠지게 된 것은 이러한 의문과 혼란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없기에 스스로가 느껴왔던 모든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종교는 이 부분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다. 특히 기독교의 이중적 잣대를 가진 신으로써는 결코 대답할 수가 없다. 구약의 신은 잔인하며 신약의 신은 자비롭다고들 한다. 뭐 내가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지만.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은 전혀 다른 신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이러한 말들은 내가 추측키로 인간의 신과 종교에 대한 왜곡된 신앙이 불러일으킨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이 아니다. 모세의 말이다. 모세가 10게명을 받았을 당시의 생활규율에 불과한 것을 하나님의 말로 둔갑시킨 몇천년전의 관습율인 것이다. 그 말을 현대사회에 실천하려고 하니 가당치도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용서치 않는다. 반드시 응징과 치죄를 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십계명을 따른다면 팔레스타인 문제가 일어나겠는가?

    신애는 믿는 자이다. 유괴범 또한 믿는 자이다. 신애는 큰 맘먹고 용서하러 왔는데 이 망할 넘은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개기름 좍좍흐르는 얼굴로 오히려 나를 위해서 기도한댄다. 신애가 하나님을 버릴 수 밖에 없는 당연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의 허상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라고 하면서 정작 용서해야 할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그 wtf에 fs한 여의봉만큼의 신축성을 자랑하는 그들만의 잣대를 믿지 않는자들이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내가 보기엔 같은 기독교지만 그 속에서 그들은 단어 하나를 가지고 서로를 비난하고 서로의 구원을 의심하며 티격태격 이단입네를 따지는 모습과 마찬가지로 웃기는 짓이다. 인간은 발전하고 있는데 신은 발전하지 않은 채 인간에게 이용당하기만 하는 한심한 모습이다..---

    앞서 말했듯 약사부부의 남편인 장로를 유혹하고 교합하는 씬은 교회의 엉터리 신자들에 대한 따끔한 일침일 수 밖에 없다. 장로란 직책은 그렇게 허투른 직책이 아니다. 존경받는 위치와 깊은 믿음을 인정받아야만 할텐데 아이잃은 후 귀신들린(그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는 모습. 바로 이러한 모습이 한국교회의 실태인 것이다.

    적당히 교회를 다니는 종찬과 이제야 조금 정신을 차린듯한 신애의 모습에서 무었을 느껴야 할까? 내가 느낀 것은 그저 땅바닥을 처다볼 수 밖에 없었다. 영화의 시작이 차속에서 바라본 푸르른 하늘이었다면 마지막 장면은 땅바닥을 비추고 있는 햇볕의 모습, 즉 양지의 모습이다. 이건 희망일까? 아니면 영원히 햇볕만을 기다리며 양지와 음지를 오가며 하늘이 아닌 땅을 바라봐야 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느낄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 함이었다. 난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태양이 비추는 곳의 땅에는 무언가가 또 다시 자랄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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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굉장히 글이 길어지고 있는데 두번째의 교회에 관한 비판 부분에서 이창동의 올곧은 용감함을 볼 수 밖에 없었다(왜 이 영화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이 시비를 강하게 걸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영화적 완성도라기 보다는 주제의 선택에 따름 과감함을 높이 살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영화는 엄밀히 두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밀양으로 살러온 신애의 상실을 묘사하는 전반부와 신애의 구원과 자각을 다루는 후반부로 구분해서 이해하는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과연 무었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가치에 대한 화두일 것이다. 여기에서 예로 드는 자식으로 대표할 수 있는 종족 번식의 본능, 아니면 종교를 통한 깨달음, 모든 것을 포기 한 후에야 느지막하게 깨달을 수 밖에 없는 혼자라는 사실일런지도 모르겠지만. 결국은 인간과 집단, 사회에 대한 관계와 소통에 따른 존재가치의 문제에 귀착되는 것 같다. 어떤 결론 도 없지만 이것 저것 참으로 다양하게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창동의 영화이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서 오히려 감흥은 덜하지만 작가의 귀환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인 것 같다.


    밀양 (2disc, 고급 양장 케이스)
    이창동 감독, 전도연.송강호 외 출연/아트서비스

    전도연의 연기- 솔직히 그렇게 대단하다고까지는 못 느꼈다. 장로를 유혹한 이후 종찬을 또 다시 유혹하는 이후의 연기는 엄청 놀라왔지만 그 이전에는 굉장히 산만하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교회에 빠져들어가는 모습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해서 굉장히 박하게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송강호의 연기가 솔직히 더 좋았다. 머리에 기름만 안 발랐다면 더 좋았으리라 생각하고 비중자체가 전도연에 너무 쏠려 있는 비정상적 영화 구조에서 그만큼 해내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캐릭터 자체가 너무 밋밋해서 어쩔수가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만약 전도연과 송강호의 역할이 바뀌었다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해보니 더 흥미롭다.

    처음에 나오는 음악과 엔딩씬에 나오는 음악은 귀에 착 감기는 것이 마음에 든다.
    쓸데 없이 길기만 한 글이 되어 버렸지만. 내가 올해 본 한국 영화들 중에는 가장 훌륭한 작품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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