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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타유발자들 A Blood Aria 2006
    Cinema/Korea 2007. 6. 25.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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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8-08에 적었던 글을 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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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외의 영화, 당혹스러운 영화. 그러니까 의외로 놀라운 영화

    일단 배우들부터 살펴보자. 내가 이 영화를 본 이유가 배우들 때문이니
    한석규, 이문식, 오달수.

    이전까지 난 한석규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의 연기를 그저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한석규는 아마 그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최고일거라고 생각한다.
    일상에 찌어들고 일에 치어 살고 가정에 골머리를 앓는 권태스러운 교통단속 경찰에서 폭력의 광기에 완벽히 몰입해가는 역할연기는 훌륭했다. 그의 정체는 권태로움에서 여러가지 상황을 통하여 조금씩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추리적인 진행방식이 아마도 그의 광기의 점증을 잘 표현했다. 조금 더 치밀했다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의 연기 문제는 아니지만, 마지막 결말에서의 흐지부지함은 그의 임팩트를 약화시켜버리고 말았다.

    이문식 역시 한석규와 마찬가지로 평가했었는데 구타유발자에서의 그의 삼색조의 연기는 솔직히 눈이 부시다. 그는 친절한 구조자의 역할에서, 폭력의 가해자로서의 정점의 역할, 피해자로서의 역할, 그렇다. 이영화에서 나타나는 모든 구타, 폭력의 중심에 있는 모든 캐릭터의 총합으로서의 역할을 그는 제대로 해내고 있다. 한석규도 최고의 연기를 했지만 이문식은 그것마저 뛰어 넘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큰 폭력의 피해자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폭력의 광기에 가장 노출이 심하고 벗어나지도 못하며 그럴 의지도 전혀 없는 캐릭터이다.

    오달수, 솔직히 내가 이영화를 본 이유중에서도 주된 것이다. 음란 서생에서의 그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해학적인 얼굴표정은 영화자체에 있어서 완벽한 감미료로서의 역할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에 비해 그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인지 그렇게 눈에 뜨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초반에 지루할 수 있는 영화에 그나마 긴장감을 부여했으며, 이문식, 한석규로 집중되어지는 광기에서 잠시나마 쉬어 갈 여유를 준다. 그의 역할은 피해자로서의 비중이 더 커보이지만 공인되어진 군대폭력의 희생자로서 하나의 본능에만 충실한 순수한 폭력이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것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단지 업신여김 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그에겐 사람이나 돼지나 똑 같이 보인다. 단지 자신보다 강하게 느끼는 것에는 본능적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로 보여진다.

    현재의 폭력장면에서 볼 때 무술액션이 아닌 너무나 리얼한 실제 싸움을 재현시켰다고 생각한다. 현재 역을 맡은 배우의 그나마 훌륭했던 연기는 폭력에 눈을 떠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주먹을 보고 스스로 놀라는 듯한 그 표정이다. 그외, 교수나 현재,양아치1,.2 도 무난했다.

    반면 인정은 역할상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고 많이 짜증이 나는 수준이다

    이제 영화 자체를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이 영화가 어떻게 전개 될지 알수가 없었다.
    비도덕적이고 호색한 성악교수는 여제자 하나와 교외로 놀러와 무언가 기회를 노리고 있다. 여제자의 경우에도 끈적거리는 교수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라고? 놀러온게 아니고 어떤 학술회에 참석한 것으로 볼수도 있다. 그 명찰을 보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인정의 교수와의 동행은 그렇게 순수하게 보이지만도 않는다. 더우기 교수의 명백히 드러나는 의도와 대비한다고 해도 말이다.

    신호위반에 따른 실랑이, 기회주의적인 교수의 비겁한 면모.
    교수와 인정의 실랑이, 이건 성폭력이라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폭력이어야 하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탐욕에 불과한 저질의 폭력을 상징한다. 지위와 이익등 상황에 의한 폭력과 남녀로 대비되는 강자의 약자에 대한 가장 저열한 폭력이다. 그리고 인정의 자기방어에 따른 도피는 여전히 억지스럽다. 교수의 허접한 시도와 왕따에 따른 구타의 목격과 봉현의 오토바이를 얻어탄 인정은 다시 개울로 돌아오게 되는데 인정의 캐릭터는 짜증스럽다 못해 바보여성의 절정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낄런지 모르지만 굉장히 억지스럽고 말이 안되는 전개라고 느꼈다.

    결국 모두는 한자리에 모이게 되고 - 모이기가 참 힘들었다.
    조금씩 드러나는 광기는 폭력의 형태를 조금씩 관객에게 선사하기 시작한다.
    구타, 폭력은 강간시도, 맞짱, 게임의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현재와 문재의 관계도 얼핏 암시를 한다. 여기에서 인정과 교수의 역할은 일방적인 피해자로서만 기능하는데 대해서 일차적으로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현재의 반란에 따른 역구타와 그에 따른 과정은 복수와 가학의 쾌락을 탄생시킨다.

    그런데 여자여, 너의 역할은 왜 그 따위인가?

    왜 여린척, 자비로운 척 하며 폭력과 복수의 완성을 막아버리는가? 이건 솔직히 조금 어거지란 느낌을 받았다.
    물론 나중에 더 큰 반전을 위한 계기일 수 밖에 없겠지만.
    이 영화에서 철저히 하나의 수단으로서만 존재하는 인정의 역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성은 폭력적이지 않단 말인가? 그냥 길 가는 교수 졸라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는 구타유발자로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방관자의 역할만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이 넘치는 폭력의 광기가 난 그녀 또한 침식하기를 바랫었다. 왜 영화 속에서 모든 사람이 변하고 있는데 벤츠안의 두남녀는 바뀌지 않는단 말인가? 인정은 총한방은 쏜다. 그건 교수머리를 때리던 핸드폰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일뿐이다.
    '
    인정의 어거지스런 맹활약으로 현재의 상태는 다시 역전, 오군의 야구방망이 한방을 부른다. 죽은 것으로 착각한 양아치 일행은 벤츠와 함께 인정과 현재를 없애버릴 계획을 실천하려 한다.

    권총을 가지고 있었던 현재는 왜 그렇게 당하고 있었을까 하는 것은 큰 의문 중 하나이다. 이 영화에서 권총은 인정 못지 않은 나에게 미움 받는 캐릭터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폭력에도 쉽게 꺼지지 않는 인간의 생명력은 마왕의 강림을 부를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이 밝혀지는 가운데, 골뱅이(봉현)와 야만인(운재)의 관계, 그에 따른 씻을 수 없는 봉현의 상처 폭력은 이제 더 이상 어떤 제동장치도 있을 수 없는 것 처럼 보인다.

    한 석규는 불합리한 폭력의 광기에서 이제 벗어난 것 처럼 보일 뻔도 했지만
    점증되는 폭력의 전염성은 다시 야만인을 불러내고 있다.
    폭력은 어떠한 형태로도 존재할 수 있으며, 그 규모와 정도의 차이는 점점 커지기만 하고 있다.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한 석규의 말은 누군가 하는 말 같지 않은가?
    그것이 통하지 않으면 남은 것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없애 버리는 것이다.

    봉현은 계속 중얼거린다. 더 때리라고 말이다.
    그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며 아직도 여전히 끝낼 생각이 없다.
    끝까지 착한 일면을 얼핏 비추는 것은(인정에게 터미날까지 태워주겠다고 하는 것)
    그가 영화의 결말을 안다 하더라도 그에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게 이 영화의 메시지겠지.

    구타와 폭력으로 반복되어지는 관계의 설정과 이야기의 구성, 연기만을 놓고 본다면 솔직히 내가 봐온 어떤 한국 영화보다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다.

    초반 교수와 인정에서 비롯되어지는 사건의 전개와 캐릭터의 집합의 억지스러움과
    결말의 처리 장면에서 나타나는 무책임함은 영화의 해석을 애매하게 함으로써
    영화의 평가 역시 애매하게 할 수 밖에 없다.
    솔직히 나의 취향으로는 아니, 나의 바램이라고 하겠다.
    여자와 교수 또한 그 구타의 과정에 동참을 했었어야 했다.
    어차피 정상을 추구하고 있지 않는 약간은 무리한 전개의 영화에서
    그 둘은 정상적으로 보이게끔 놔두었을까 하는 부분이 그 첫번째 이유다.
    두번째 이유는 두 형제의 죽음만이 추측될 뿐. 나머지는 너무 무사하다는 것이다.

    모든 폭력의 시작이었던 문재는 폭력이 아닌 쥐약때문에 죽는다.
    폭력과 구타의 정점과 최하부만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너무나 훌륭한 절정부분인 운재와 봉현의 광기의 충돌에 비해
    마무리의 처리는 너무 엉성했다는 느낌이
    이 영화의 평가를 절하시키고 있다.

    쥐약에 죽어버리는 야만인은 그냥 약자로서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우리 약자의 바램일뿐이다. 구타를 하는 자와 구타를 받는 자 둘을 동시에 죽여버림으로써(둘이 형제란 사실도 있다) 내용상으로는 모든 폭력과의 단절, 그 폐혜의 결과를 보이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그래서 아쉽다. 다시 생각해보면 영화의 모든 인물은 다 죽거나 폭력의 광기에 더 물들어 있어야 했다.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광기가 조금 더 진했다면 걸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조금 부족했다.

    이 영화를 보면 폭력의 역사란 영화가 떠오른다. 그 영화는 폭력이라기 보다는 살인자의 삶이겠지만 말이다.

    내가 짚고 넘어간 몇가지 조차도 포함하여 참 즐겁게 보았다.
    개울에 모이기까지의 부분 과정만 참을 수 있다면
    구타씬은 너무 리얼해서 보는 내내 아픔을 느낄정도로 사실적이며
    이 영화는 당신을 무차별 구타하고 그 광기에 휩쓸리게 할 것이다.

    폭력이란 것은 인간의 가장 공격적인 표현수단임과 동시에 삶의 수단으로 기능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있어 폭력은 구타란 형태를 통해서 가장 많이 드러나고 있다. 폭력의 본질이 변이되었고 더 이상 일반적인 삶의 수단으로서의 물리적 폭력은 드물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육체적 접촉이 없을 뿐 더욱 교묘해지고 영리해진 폭력은 여전히 왕성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도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채로 말이다.

    우리는 정치폭력을 겪고 있으며, 미국이라는 초강대한 폭력에 무방비로 맞을 수 밖에 없으며 약하기만 한 우리는 미약한 저항조차 힘겨운 입장이다. 즉 강자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 약자 괴롭히기는 개인이 아닌 국가단위 사회 단위에서 더욱 활발하고 오히려 용인되고 있으며 끊임없이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수단으로서의 폭력이 아니라 지금은 착취와 기만을 위한 대규모 폭력의 시대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당신은 구타유발자인가?
    구타를 하는 사람인가?
    구타를 당하는 사람인가?

    아마도 오군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짐작해본다.
    그 폭력이라는 광기에 미쳐버린 우리는 오군처럼 인식하지 못한 채
    돼지를 단순한 이유로 두들겨 패 죽이고 있는 건 아닐까?

    당신이 단순히 피해자고 약자라고 착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 ps. 쥐약 먹은 문재는 죽었다. 쥐약먹고 죽은쥐를 먹으면 안 죽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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