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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A: Остров (Russia)
The Island (International: English title)
감독: 파벨 링겐 Pavel Lungin
아나톨리: Pyotr Mamonov
처음 영화를 보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략적으로 믿음에 관한 영화라고 느꼈을 뿐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을 느낄 수 있었으며, 영화가 외적으로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내용속의 믿음에 관한 내용은 여전히 공감이 가지 않는다. 따라서 아래의 내용은 처음 보고 느꼈던 것들과 한 번 더 보고서 느낀 것들이 혼합되어 의미가 혼재되어 있을 수도 있다. 나름대로 구분하긴 하겠지만.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것은 거의 종교영화라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식으로 영화를 이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과거에 자신이 범한 죄에 평생을 두고 속죄하며 괴로워하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읽었을 뿐이다. 2차 대전 중 해군의 예인선에 근무하던 보일러병 아나톨리는 독일군의 위협에 선장인 티콘을 쏘고서야 겨우 살아나게 된다. 예인선이 폭발한 후, 근처의 러시아정교 신부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게 된 아나톨리는 신부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30년이 흐른 후, 아나톨리는 여전히 보일러실에 처박혀 살며 기행을 일삼는다. 동료신부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된 삶을 살며, 교회의 행사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 그는 일반인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성자로서 추앙받고 있는데 그가 신경 쓰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속죄를 구하는 것이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동료신부의 질시는 어떤 집착과 소유를 가지지 않은 채 하나님만을 구하는 정교회의 교리에 너무 충실하기에 빚어지는 것이다. 기적을 행하는 성자로서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그를 찾는데 걷지 못하는 소년을 걷게 하고, 미친 여인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도 그에겐 의미가 없다. 속죄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구하는 삶을 모두에게 알릴 뿐이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는 유일한 것은 자신이 용서받고 평안한 죽음을 맞이 하는 것일뿐이다. 그가 평생을 두고 짓눌려 있던 동료를 죽였다는 자책감은 우연히 딸의 치료를 위해 아나톨리를 찾은 티콘장군에 의해서 해소가 된다. 이미 오래전에 티콘은 아나톨리를 용서했다는 것이다. 아나톨리가 느꼈던 죄책감은 자신이 행한 기적들처럼 본인만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었다. 모두가 용서한 죄를 짊어지고 있던 아나톨리는 그제서야 자신의 예정되어진 죽음을 준비하고. 관속에서 죽음을 맞이 한게 된다. 그를 질시하던 신부 욥이 관을 준비하고 십자가를 운반하고(예수가 짋어졌던 십자가의 고행을 차용) 아나톨리가 평생을 머물렀던 오지의 섬에서 떠나게 된다.
아나톨리가 믿었던 또 믿지 못했던 것은 무었일까? 처음 보면서 느꼈던 인간적인 면만으로 이 영화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아나톨리가 믿었던 것은 하나님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죄책감 속의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의 형상화일 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전능하다고 노래하면서도 끊임없이 스스로의 죄를 참회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오히려 믿지 못한다는 다른 표현이 아닐까? 그가 다른 신부들과 교류하지 않고 자신만의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스스로의 죄가 더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중이 제머리 못깍는다는 표현이 있듯이 그 또한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도 자신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다른 사람의 모든 일을 알고 해결하는 성자인데도 말이다.
이런식으로 영화를 이해하니까 뭔가가 어설프고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적인 배경을 약간 구글(Google)해보고 다시 보게 되었다. 아나톨리의 삶은 위의 줄거리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러시아 정교회 신앙의 근간에 가장 근접한 형태의 수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러시아 정교신앙의 근간은 검소함과 고행에 기초한 끊임없는 참회와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소통과 일체감이다. 정교의 신앙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과의 교류협력을 통하여 조화를 이루어낸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이해하고 본다면 아나톨리 속에 내재 되어 있는 평생의 해묵은 죄책감은 끊임없는 참회와 기도를 할 수 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구원을 원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곁에 부끄러움 없이 서고 소통하기를 원하는 표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적 관점에서는 이미 아나톨리의 죄는 의미가 없다. 아나톨리와 신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믿음을 통한 소통의 방식외에는 존재하지가 않는다. 아나톨리가 맞이한 죽음은 신에게 다가가는 고행의 완성이고 예수가 십자가의 고행을 매개로 부활을 이루어 내듯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한 과정일 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본다고 해도 여전히 뭔가가 부족하며 아직도 순수한 종교영화로 볼수는 없었다.
결국 두가지 관점을 모두 인정하고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것이 우선시 되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나톨리라는 신부의 삶이 종교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극 중에서 경원 당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종교영화임을 인정해야 한다. 특정종교의 신앙을 차용하긴 하지만 믿음과 소통의 방식에 대한 순수한 접근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아나톨리가 평안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 인간의 용서가 조화를 이루어서 스스로 평안을 찾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인 것이다. 자신조차 스스로를 믿지못한 채 무언가를 믿는 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나톨리는 성부성자성신이라는 세가지 신.인간.믿음이 조화를 이루면서 구원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믿음에 대한 영화이고 종교영화이며 인간의 삶이 어떤 것이란 것에 대해 생각케 하는 사람이야기라고 느낄 수 있었다. 두번째에서야 영화에 대한 미약한 이해가 가능했고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아래 줄 그어진 내용은 영화를 처음 보고 순간적으로 휘갈긴 부족한 생각이긴 하지만 기록삼아 남겨둔다.
내가 종교에 대해서 아는 것은 겉핥기 뿐인 단편적인 지식일뿐이라 거기에 대해서 어떤 주장을 함부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올바른 것과 그른 것의 차이점 정도는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와 믿음에 관한 영화라고 볼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보고 싶지는 않다. 오해로 빚어진 죄책감이 끌고 간 삶속에 종교가 있었고 그 종교를 통해서 위안을 얻으려고 했을 뿐이다. 과연 그는 위안을 얻은 것일까? 하나님이 말하는 천국에서의 평안을 그는 바라고 있는걸까? 그렇게는 절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하던 개인의 자유이지만 아나톨리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도피했을 뿐이다. 그렇게 믿어야만 자신이 편안해지는 이기심일 뿐이라고 느껴진다. 이렇게 느낀 것에는 내가 무성한 턱수염과 치렁치렁한 사제복으로 기억하는 러시아 정교와 러시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때문이기도 하다.
아주 비뚤어진 시각일 수도 있고, 몰이해에 따른 왜곡된 관점일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믿음이란 과연 뭔가라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구원을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다. 아나톨리의 믿음은 오해와 잘못된 행동에서 시작한다. 모두들 구원을 이야기하고 바른 종교관을 강요하지만 아나톨리는 그냥 믿을 수 밖에 없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일테니. 자신이 원하지 않던 상황 속에서 강요되어진 행동을 평생을 두고 속죄하는 모습은 러시아의 어떤 현실과 정교의 또 어떤 모습일 것이라 유추되어진다.
영화 내용에 대한 부족한 이해를 접어둔다면 황량한 섬에 있는 교회와 주변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대단히 아름답게 보여준다. 눈덮인 황량한 섬, 석타과 재로 인한 지저분함이 보이지 않는 화면은 묘한 부조화의 느낌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영화가 가지는 완결된 내러티브의 구조와 전개, 캐릭터의 완성도를 나중에서야 느낄 수 있었다.
만약 한 번 보고 모든 것을 이해하셨다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
아래 more는 부족한 소견으로 그냥 주절거린 한담일 뿐이니 안 보시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나라의 종교문화는 솔직히 어느 종교,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대부분 세속에 물들어 있다. 그들이 찾는 것은 진리도 아니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아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교회, 사찰, 성당등의 건물과 그 건물을 채울 수 있는 머릿 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돈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최근 탈레반 납치라던지, 이랜드 등등 기독교, 개신교에 연루되어 있는 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관심도 전혀 없었으며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고 은폐되었을 뿐인 오래전 부터 있어왔던 것들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하기에 말이다.(그렇다고 내가 그들의 생명의 가치를 경시한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기를, 난 어떤 이념과 체제등의 가치에 앞서는 것이 인간의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이념, 종교, 가치, 체제는 의미가 없다. 난 그들이 무사하기를 바라고, 국가가 어떠한 가치들에 우선해서 그들의 생명을 구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잘잘못은 존재이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누구나 느낄 테지만 야경을 보게 된다면 우리나라 어떤 장소를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쉽게 볼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다. 교회의 십자가와 모텔 광고판이다. 이미 밤하늘의 별은 거의 사라져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이 두가지를 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장소는 그 어디에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두개의 건물은 공통점마저 가지고 있다.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돈과 더불어 자신의 인생도 누군가에게 저당을 잡혀야 한다는 사실만 틀릴 뿐이다.
외국과 비교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실상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영화같은데서 흔히 보이는 장면들, 아무 교회나 자유롭게 들어가서 기도하고,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는 아마도 불가능할 듯하다. 만약 당신이 그런 목적으로 어딘가의 교회던지 들어간다면 당신은 아마존의 피라니아 떼에 둘러 쌓인 먹이 신세가 될 것이라고 거의 장담한다. 어디교회 다니세요? 구원은 받으셨나요? 교회 나오셔서 천국가야죠...... 교회는 개방되어야 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종교는 사람들의 안식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마음의 양식이 되어야 할 종교가 사람들을 양식으로 하여 교세를 키우고, 어마어마한 건물은 그들의 믿음이 되어버리고, 신도의 숫자가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권능이 되어 가고 있다.
난 그들이 믿는 것이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기독교도들도 있고 몇몇 건전한 교회도 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으며 종교의 가치와 필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하고 공감한다.
물론 한국 교회의 문제점이 타 종교에 비해 쉽게 드러났을 뿐 다른 종교들의 폐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길을 걷다보면 '도'를 믿으십니까? 라며 따라붙는 사람들도 있고 알게 모르게 사이비 종교들도 많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전도를 행하는 사람들(기독교 뿐만 아니라). 난 그들이 잡상인들의 호객행위보다 더 싫다. 차라리 잡상인들은 솔직하다. 돈을 벌겠다는 목적이 있으니까?(꽤 오래전 깡패중들의 집단 난투극도 기억이 난다) 그들이 믿는 것은 신앙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며 신의 이름을 위장한 물신사상에 찌든채 돈을 믿을 뿐이다.
만약에 아니라면 지금 당장 교회를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기부한 후, 천막을 치고 목회를 열고 모여서 기도하라. 건물을 지을 돈으로, 전단지와 광고를 찍을 돈으로 도서관을 짓고 책을 만들어라. 종교는 인간을 이롭게 해야 한다. 인간이 종교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속적일 수 밖에 없는 사람이기에 이런 생각밖에 못하긴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어떤 성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지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남들의 성지는 나에게 있어서 악마의 장소일테니. 온 나라가 성지라고 주장하는 바벨탑의 형상을 한 거대한 무덤들만이 삐쭉거리고 존재할 뿐이다. 또 성지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곳을 자신들의 성지라고 말한다. 뭐 그래서 타종교의 성지에 가서 황당한 일을 벌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아나톨리가 신부가 햇던 것 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돈 앞에 사람앞에 무릅꿇지 말고 오직 하나님앞에 무릎꿇고 그만을 섬겨라. 하나님은 당신의 돈과 집으로 먹고 살지 않으실 것은 모두가 알지 않는가. 하나님을 섬기는 만큼만 타인을 섬기는 모습을 볼수만 있다면 난 당신들을 찬양하고 따를런지도 모르겠다.
또 유일신에 기초한 기독교의 하나님은 편협하며 잔인하고 이기적이다. 자신이외의 것을 모두 부정해야만 한다. 제물을 바쳐야 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베푼다고 한다. 왜 당신은 그렇게 베푸는 데 우리는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껴야 할까? 해서 난 종교에 대한 거부감은 가지고 있지 않고(오히려 장점에 의한 순기능적 필요성을 인정하긴 하지만) The One 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The One은 바로 개개의 인간들이어야 한다. 타인을 존중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진 인간들 말이다.
영화에서 아나톨리 신부가 행했던 고행과 그의 믿음이 옳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그의 믿음에도 분명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까. 그것은 내가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묻고 싶은 의문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인간의 이전이후의 모든 죄를 사했다는 말을 망각하는 지 말이다. 예수님이 모든 죄를 사했는데도 항상 스스로 죄인이라 칭하는 이들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구주가 모든 죄를 사하셨네라는 찬송을 하고는 또 금방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을 해버린다. 말이 되지 않는 것 아닌가?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못한채 끊임없이 죄를 범하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이 아닐까? (모든 교회가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죄없다고 주장하는 곳도 있다)
그냥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 길어졌고 좁은 생각에 의한 것이니 의도하지 않은 의미가 들어갈 수도 있으니 이해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