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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의 라쇼몬 Kurosawa Akira 아키라의 작품은 이걸 두번째로 본다.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일본의 내가 아는 거장들은 참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아키라, 쇼헤이, 야스지로 몇작품 접해보지도 않은 채 이런 말 하는게 조금 우습긴 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천국과 지옥에서 처음 접한 아키라는 그 명성에 비해 많은 것을 느끼진 못했었다. 물론 재미있었고 좋은 작품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거장이라 이름 붙을 수 있는 감독들은 한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한작품 씩 이렇게 접할때마다 느끼는 것 같다. 쇼헤이가 그랬고, 아키라가 그렇다.
라쇼몬, 사무라이 영화인 것 같다는 느낌만 받고 보게 되었다. 구로자와 작품을 보지도 않은 채 그냥 사무라이 전문, 사극 전문의 대규모 영화전문일꺼란 잘 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언급한 위 감독들 중 아마 가장 대중과 호흡하기 편한 스타일일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사무라이 영화라기 보다는 인간 본성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임과 동시에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역사왜곡에 대한 의문을 강력히 표현하는 영화라고 생각되어진다.
인간본성에 대한 것을 생각해보자.
하나의 살인사건이 있으며, 그 살인 사건을 이야기 하는 세사람이 있고, 당사자 세명이 있다. 비겁하지만 일반적인 소시민, 인간에 대한 불신과 믿음속의 갈등, 원초적 이기심의 당위성. 복잡하긴 하지만 위와 같은 입장을 가진 세사람의 대화를 통하여 다 무너져가는 라생문(羅生門) 밑에서 비를 피하며 사건의 실체가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강도, 아내, 남편 이 세명의 진술을 통하여 살인사건의 의혹은 풀어지기도 하고 증폭되기도 한다. 각자의 입장과 생각에 따른 자기 변명은 생사를 불문하고 자신에 유리한 쪽으로 이야기들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가? 단 한가지의 진실은 "남편"이 죽었다는 것이다. 단 하나의 죽음에 대해 자신이 왜곡 각색한 이야기들은 그들의 입을 통하여 사실로 포장되어진다. 결국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왜 관청에서 관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증인과 피고들의 모습만 보여지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일까? 일단은 관리가 나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관리는 바로 우리 관객이며 그들의 죄와 벌을 이끌어 낼수 있는것도 관객이기에, 판관의 모습은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건 관객에게 구로자와가 묻고 있는 방식으로 보인다. 한가지 진실 세가지 왜곡 그리고 객관적 사실 하나로 나타나는 이 사건은 인간의 추함과 비겁함에 대한 고백이며 자아비판이다. 인간은 그렇게 이기적이며, 정직하지 않고 모두들 각자의 변명을 항상 가지고 있는 추악함이라고 쏘아대고 있는 것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기대도 어떤 절대적 사실 앞에서는 흔들릴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기의 옷과 장신구 마저 강탈해가는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어떤 절망을 암시한다. 물론 그 아기는 회개와 반성 그리고 믿음의 회복등이 가능한 기호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라생문이란 상징적인 제목에서의 아기의 울음 소리는 아키라의 절망속에서도 피어날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이런 희망이 있으니 살만하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란 것이 있어야 희망도 생긴다는 것이다. 어떻게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기의 울음소리를 통하여 강조하고 있다. 나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 살려주세요, 같이 살아갑시다. 우리 살아있다니까? 그런 말로 믿고 싶다.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 역시 위에 언급한, 사실 하나 변명 셋 입장 셋 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사실로 믿는 것들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닌 이상 간접적이고 가공된 것들이라는 것이다. 객관적 가공이 아닌 주관적 가공을 거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모여서 우리에게 전승되는 것들이 역사이며 전통이다. 이 영화에서와 같다. 과연 어떤 말을 믿을 것인가? 나중에 나뭇꾼이 말한 진실은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고 있으며,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가치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결국 우리가 판관의 입장에 있다면 나뭇꾼의 이기적인 생각의 진술 밖에 들을 수 없으며 세개의 변명들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사실에 대한 가공(왜곡)과 어떤 선택들의 만남이며 집합인 것이다. 즉 우리에게 유리한 것들만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1950년이면 일본은 2차 대전 패전 이후의 힘든 시기이며, 한국전의 특수를 누리기 전후일것이다. 또 패전이라는 굴레에서 그들의 삶에 대한 당위성을 정립해야 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 시기에 이러한 살인사건에 기초한 인간 본성의 변명들을 기술한 것은 일본의 당시 상황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의 전후 처리 절차나 입장에 대한 엄정한 판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영화기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강도가 나무를 헤쳐가면서 뛰어가는 장면들은 마치 왕가위를 보는 것 같았으며, 남펴이 죽는 같은 장소에서의 상황만 조금씩 가공되어진 같은 장면들은 변명에 의한 상황의 비틀림을 인물의 배치, 보는 위치등이 적절하게 바뀌면서 그 긴장감, 궁금함을 계속 유지 심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이다.
라쇼몬에서의 강상황과 대사들은 정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볼때는 이거 뭔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영화가 결말으로 가면서 그 모든 것들이 정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의문이 다 풀려버리는 치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국과 지옥에서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 연기, 상황, 배경, 대사 그 모든 것들이 끝으로 가면서 완벽해져 버린다고나 할까 뭐 그렇다는 말이다. 잘 모르는 말은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
이제 결말을 이야기하자면, 난 이런 결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바랬떤 결말은 나뭇꾼 또한 아기에게서 뭔가를 취하고 도망가버리는 것이었다. 사람이 너무 삭막한거 아냐? 라고 물으면 - 나 삭막해 라고 대답하련다. 이왕 희망을 주려고 했으면 스님이 아기를 데려가면서 그래도 살아야지. 이제 너에게 희망을 어쩌는 식으로를 바랫다는 말이다.^^
아키라는 정말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도 믿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천국과 지옥에서도 그 애정을 얼핏 느꼈지만, 아키라는 내가 본 두개의 영화에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가치를, 인간이라는 존재를 삶속에서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믿는다는 느낌을 가졌다. 쳇 두편 보고 많이도 아는 척 하는 것 같아 좀 쪽 팔린다. 그런거야 앞으로 좀 더 보고 생각하면 될일이고. 이만 마무리 지을랜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내가 본 두 작품은 일단 재미있다. 결코 지루하지 않으며 보여주지 않는 것들에 대한 명백한 의도를 통해서 관객을 몰입시키기도 하고, 그 간격을 벌리기도 하는 등 정말 연출에 있어서는 완벽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