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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이드 인 홍콩 Made in HongKong 香港制造 1997
    Cinema/China 2007. 12. 2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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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香港制造
    사용자 삽입 이미지
    Director 프룻 챈
    Cast 이찬삼, 당가전
       미래와 희망이 없는 청춘의 비극적 자화상. 청춘은 아름답다고들 한다. 인정한다. 미래는 젊은이들의 것이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그렇다. 청춘은 저물고 또 다른 기성만이 우글거리는 미래를 상상하지 않으면서 다만 아름답다고들 한다. 몰이해와 교류의 미비를 인정치 않고 자신만의 관점을 강요하는 사회. 느껴지는 혼란을 질서로 강요하며 자신의 청춘을 부정한다. 당연히 청춘은 인정치 못한다.

       이 영화에서 청춘의 비극으로 인지될 네명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사랑, 방관, 방황, 방종. 병, 혼란 그 어느것도 해결없이 다만 아름답다는, 희망찬 청춘의 강요가 빚어낸 것이 이들의 죽음이라 느껴지는 것은 나의 삐딱하기만 한 시선에 불과할 런지도 모른다. 느껴지는 것이 젊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 자체와 더불어서 아름답게 바라 볼 수 있는 시선의 이해라는 것일까?

       흔들리는 화면, 혼란스러은 앵글속에 캐릭터들의 복잡한 사정과 망상과 상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연출은 진실을 비틀어버리고 혼란만을 남겨둔다. 그러나 여전히 바뀌는 것은 없다는 듯, 세상은 그대로 존재한다. 아름다운 청춘의 의미가 퇴색하는 순간이다. 무언가 바껴야만 한다는 의미없는 경고만이 반복되지만 그에 대한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닐까? 이 세상을 유지하고 기약하는 것은 단지 혼란스러운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에 불과한 것일까? 청춘을 노래하지만 청춘의 푸르름을 부정하고 비극을 노래하지만 슬프지는 않은 묘한 느낌의 영화.

       오래전 부터 이 영화를 봐야지 생각했었고 초반부에 느껴지는 어색함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엔딩에서의 회상 또는 주마등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 되돌아봄의 장면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청춘, 홍콩반환을 즈음하여 청춘의 사망을 선고하는 듯한 이 영화는 절망을 노래하는 것일까? 아니면 은닉되어진 희망을 발견하기 위한 자세를 알리고 싶은지 장담은 할 수 없다. 단지 극도의 혼란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양아치 차우의 사랑, 보선의 투신자살. 핑의 병사. 아롱의 살해. 등장인물 모두가 죽어버리지만 남겨진 것은 흥건한 핏자욱과 비문 그리고 한장의 편지에 불과하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라는 제목도 있지만 이 영화는 절망 속에 노래하는 희망에의 반어법으로 여겨진다. 아니 솔직히는 절망조차 인정할 수 없다. 절망이 뭔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 함께 하고 싶었던 이들에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어떤 이별의 기록이라고 여겨진다. 또 다른 세상을 꿈꾸지 못하는 청춘에 대한 사형선고이며 그러한 청춘을 양산한 사회에 대한 경고일까? 홍콩이 백여년간 이루어 낸 것과 그들이 맞이해야 할 미래에 대한 불안을 사그라진 네 청춘을 통하여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벌써 10년이나 지나서 보게 된 이 영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아름다움이 부재하는 사회에 대한 신음을 크게 토해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영상을 그 신음을 제대로 포착해서 홍콩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봐도 아주 새로운 느낌을 주는 영상. 청춘느와르라고나 할까?

    Trai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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