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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A: The Blue Wolf: To the Ends of the Earth and Sea
감독: 사와이 신이치로
테무진(징기스칸)-소리마치 타카시反町隆史
쿠란- 고아라Ara
징기스칸Genghis KahnЧингис Хаанwiki 광활한 초원의 정복자이며 가장 광대한 영토의 지배자로 알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침략자에 불과할 수도 있다(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하여튼 영화나 드라마등의 소재로서는 완벽한 인물 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일단 이 영화를 내가 재미있게 본 것에는 그 서사구조나 작품성에 기인하지 않는다. 단지 지평선을 한번도 접해보지도 못해 광활한 초원의 넓이를 가늠해 볼 수 조차 없는 내게 화면 속에 턱하지 펼쳐진 몽골초원의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은 이전에 보았던 몽골영화 투야의 결혼KLoG 에서 느꼈던 황량하기까지 한 회색사막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일단 몽골의 초원에 느끼는 경이로움이 내가 느끼는 재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네이버 영화의 줄거리에 나와 있는 "징기스칸의 인간적인 내면을 그린 몽골건국 800주년 기념 일본-몽고 합작 영화."라는 부실한 내용은 정확하긴 하지만 좀 허탈했다.Naver 영화참조
위 네이버 영화의 내용처럼 처럼 징기스칸을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중의 하나로 사용되어졌음을 알면서도 광활한 자연의 대지가 주는 감동에 거짓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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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무진(징기스칸)의 탄생비화에서 부터 시작되어지는 영화는 끝까지 그의 가족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것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것이 사실이다.
테무진의 어머니는 납치된 적대부족장의 아내였으며 테무진의 출신성분 또한 그쪽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의심의 결과는 부족의 분열을 불러오고 잔인하면서 냉정한 성격의 테무진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중의 하나이자 굴레가 되는데, 테무진의 가족사와 여인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인간적 면모를 강조하려고 한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당시 몽골에서의 여자의 지위는 욕정의 대상이며, 종족번식의 도구로써 존재한다. 테무진의 성장과 전쟁에서의 수행이유를 어머니, 아내들, 자식과의 관계발전과 변화를 통하여 어설프게 전개하며 이유로는 풍요로운 몽골의 확립이고 다시는 비극적인 전쟁의 잔재로써 여인들의 피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든다. 척박한 환경에서 풍요를 꿈꾸고 인간적 면모를 강조하긴 하지만 단지 일방적 찬양으로 밖에 느껴지지를 않는다.
그런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는 침략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끝까지 어설픈 궤변으로 느껴지는 말을 통해 침략을 정당화하긴 하지만. 더 큰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 일단 피를 먼저 흘려야 한다는 말은 사교집단에서 산제물의 피를 바치는 의식과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테무진 주변의 여인들에서 억지로 어떤 상징성을 부여해본다면
어머니 커어룬은 출생에 대한 의혹의 단초를 제공함으로써 테무진이 겪는 이후 상황에 있어서 겪게되는 갈등의 그 시작점점이다. 테무진의 어머니는 몽골부족의 과거의 비극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며 그것이 당시의 몽골이 빚어내는 끝없는 전쟁의 잔재로써 과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첫번째 아내 보에티는 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여인들의 비극을 상징한다. 영화속 테무진에게 강한 믿음을 얻게 되는 기저인 약속과 배려의 상징이며 애증의 대상이 된다. 어머니에게 일어난 비극을 반복치 않겠다는 약속이 깨지게 되고 그것을 반복치 않겠다는 새로운 결심의 상징인 자신과 같은 경우의 아들을 생산하게 된다. 테무진이 느끼는 딜레마속의 곤혹을 의미하고 있다. 보에티는 또한 자무카와의 우정과 경쟁의 대상이었지만 여전히 몽골부족의 바뀌지 않은 현실을 암시함으로써 아직 바뀌지 않은 현실을 의미한다.
두번째 아내인 쿠란은 몽골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자구책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갈구하는 모습일 것이다. 피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서 자립하고 오히려 도움을 주는 몽골말이다.
이 세 캐릭터는 테무진이 느끼는 몽골의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모습이다. 테무진은 이들을 위해서 몽골을 풍요롭게 하겠다는 원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며 그것은 테무진의 내적갈등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가족사외의 갈등으로는 먼저 자무카를 들수 있는데 이들은 같은 꿈을 꾸고 있지만 다른 방식을 택한다. 여기에서 영화는 테무진의 인간적 면모와 배려를 강조함으로써 자무카를 패배시키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자무카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테무진이 그를 죽이는 장면은 완벽한 일본적 무사도라고 봐도 무방하며 또한 어설픈 대의의 포장에 불과하다. 진정한 의미의 우정을 보여주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정치판의 협잡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네가 왕임을 인정한다 명예롭게 날 죽여달라. 왜 이런 가치관이 존중을 받는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 또한 징기스칸 미화의 한 장면일 뿐이다.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일본만의 가치는 아니지만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위에서의 억지처럼 보일 수도 있는 상징성의 부여는 의미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영화에서 그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기에 나름대로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개인적 감상설정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테무진의 인간적 면모는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짓과 기만으로 도배되어진 정치깡패들의 선거공약문구를 보는 떱떨함이 들었다
어떤 영화에도 미덕은 대부분 있게 마련이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즐겁게 본 부분은 전투씬에 있어서의 거대한 물량공세와 놀라운 마상궁술 전투씬이었다. 몽골족은 모든 기병들이 '반지의 제왕'의 레골라스 급인가? 전쟁의 규모와 스케일이 놀랍긴 하지만 꽤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전투씬에서 볼만한 것은 몽골 기마병들의 환상적 활솜씨였다. 모두가 '레골라스'급 마상궁술을 소유하고 있는데 어찌 누가 대적하겠는가? 몽골의 세계정복이 단순하게 이해가버리기도 했다. 그 엄청난 기마병들의 전투를 이렇게 지루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앞서 말했지만 이 영화는 800주년 기념 일본과 몽골의 합작영화이다. 몽골의 광대한 초원과 물량에 일본의 자본이 결합하면서 일본적 관념에 기초한 듯한 여러가지 장면들은 눈살을 찌푸릴수 밖에 없었다. 테무진이 위대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일방적인 찬양일 수 밖에 없는 영화지만 왜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켜서 침략을 정당화하는 듯한 어설픈 변명이라는 느낌이 나를 굉장히 불편하게 한다. 좀더 꼬인 생각을 덧 붙이자면 마치 일본의 과거침략의 의도를 정당화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징기스칸이 위대한 인물인 것은 몽골에서만이 그렇지 않을까? 중국에서야 그는 야만적인 오랑캐 침략꾼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리고 일본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지는 모르겠다.(거의 없을 것 같다) 설사 있다면 침략자의 변명이요 정당성확보를 위한 궤변으로서의 가능성 뿐이기에 이런 의심은 거의 확신에 가까워졌다. (너무 꼬인 생각인가?)
광활한 초원 몽골을 통일하고 정복한 테무진이 드디어 징기스칸이 된다. 그는 중국을 정복해 국경과 불평등을 없애고 모두가 풍요로운 세상을 위해 피를 흘릴 결심을 한다. 침략자의 부당성에 대비한 억지스런 이유의 첨가가 아닐까? 초원을 떠나 만리장성을 향해 아들을 떠올리며 날리는 화살은 침략에 대한 변명과 어설픈 신파의 절정이다.
어설픈 가족사의 신파를 끝까지 끌고 간 것은 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개인적 고통을 부각하여 징기스칸 개인의 인간적면모에 호감을 가지게 하는 것에 불과했다. 징기스칸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개인적 욕망과 역량만으로 전쟁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 뒤에 함께 하고 있는 각 부족들의 욕망이 결합되어져야만 전쟁이 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부족한 것을 빼았기 위해서 풍요로운 중원을 침략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징기스칸이 마치 부당한 모든 것에 대한 질서의 확립과 평등한 세상을 쟁취하기 위한 개인적 결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내가 몽골의 역사를 모르고 큰 관심도 없지만 이건 아닌 것 같지 않은가? 모든 것을 결정한 요소가 정녕 그게 다란 말이냐?
잠깐 잊고 있었다, 전기영화라는 걸. 당연히 징기스칸외의 모든 인물들은 그냥 부속물에 불과하다. 징기스칸에게 영향을 미치는 네명의 인물들 또한 그 치장의 도구일 뿐이다. 개인의 광기와 선택이 지배하는 사회를 보여주고 여전히 그러한 사회에 살고 있는지로 모르는 우리이긴 하지만 역사왜곡과 미화를 통한 침략의 정당성 확보라는 것은 WTF이다.
따라서 푸른 늑대는 나름 재미있게 보았지만 뒷맛이 영 씁쓸해지는 영화였다. 그것이 일본에 대한 뿌리깊은 감정에 기인하기도 했겠지만 일단 징기스칸이 일본어를 사용하는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이미 꼬투리 잡기가 시작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몽골의 위대한 영웅을 일본의 배우들이 일본어로 연기하는 모습은 영화와 배우에 관계없이 유쾌하지는 않은 경험이었으며 그 내재해 있는 무의식적 침략의 정당화를 느끼게 되면 어처구니가 없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내가 보았던 것 중 기억하고 싶은 것은 몽고의 초원이며 기마병들의 놀라운 궁술뿐이다.
편견과 오독에 가득찼을 지도 모르는 감상을 적고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래 more의 내용은 영화보고 문득 떠 올랐지만 영화와는 별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굳이 따로 포스팅할 생각이 없기에 그냥 살짝 숨겨서 덧 붙인다.
이 영화를 그딴 식으로 보다니 무슨 헛소리냐구? 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영화만으로 판단해야만 한다. 그건 너무 억지 아닌가? 라고 생각할수도 있겠다. 그런식으로 영화를 보는 건 편향된 시각이 만들어낸 오독과 왜곡아닌가? 라고 말한다면 내가 영화를 보는 시각에는 당연히 편견이 섞여 있으며 약간의 억지도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영화를 영화로만 봐야 한다는 말은 내가 지키려고 하는 몇 안되는 말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중요한 것이 더 있기에 이렇게 마음껏 억지로 까대기도 한다는 것이다.
영화자체만으로 감상해야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감상하고 느끼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화내적, 영화외적 부분에 관계없이 심지어는 영화에도 관계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고 상상하는 개인적 연상 과정에 있다고 믿고 있다.
영화를 이렇게 봐라 저렇게 봐라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냥 보고 싶은대로 보고 느끼면 된다. 난 비평을 하는 것도 아니고 비난을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영화를 보고 떠오른 생각들을 중구난방 개인적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어떨때는 영화를 본 이후 이렇게 글을 적으면서 상상과망상을 하는 시간이 영화보는 시간보다 더 길어지기도 하며 개인적으로 더 중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개인적 시각에 기초한 자유롭고 무책임한 감상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비평이나 평론의 부분에 있어서 나는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 그것이 어떤 망상에 가까운 비평이라 하더라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아주 많이 다른 의견의 하나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일희일비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잘못된 비평은 있을 수 없지만, 나쁜 비평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비평이나 평론이란 것은 흔히 말하듯 영화라던지 이슈, 작품 자체만을 평가하는 것도 아니며(거짓말이다. 비평 그렇게 했다가는 굶어죽을 것이며 살아 있는 비평이 아니다. 비평의 대상 묘사하는 것 자체가 그 속에 국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작품의 내,외적 요소와 사회적이슈, 파장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그 어떤 시각이던 깊은 고찰을 전제로 해야한다. 비평은 감상이 아니다. 이렇게 느꼈고 저렿게 느꼈다고 나처럼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주체적인 의식과 일관되면서 자신이 본 모든 작품에 공평해야만 한다. 객관적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을 공평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에 따라 이중적 잣대를 가지는 비평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이며 객관적이 아닌 것은 물론이요(비평에 객관적이란 말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주관적 가치관마저 서 있지 않은 감상에 불과하게된다(내가 올린 대부분의 글이 그렇다)
그래서 난 비평을 할 능력도 없고 하지도 않는다. 내가 비평을 하게 되면 비난이 되고 과도한 찬양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비평가는 반드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글에 대해서 진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과 비평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후에 벌어질 수도 있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확고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이슈가 되는 어떤 이의 글은 물론이고 그 방송조차 보지 않았으며 뭐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그사람이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유치찬란한 문구에 대해서는 어이가 상실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논지가 어떻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비평을 하는 이유를 망각하고 있는 지식인의 어글리한 모습을 볼 수 밖에 없었다.
또 우리나라에 진정한 평론가, 비평가가 얼마나 있는지도 의문이다(없다는 것이 아니라 드물다는 것이다) 물론 난 Review라던지 어떤 평론들을 왠만하면 읽지 않는다. 또 읽어도 이해를 잘 못한다. 어려운 말, 현학적 내용에 기초하여 대중에게 지식을 자랑하고 현혹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인양 착각하는 이들은 비평가가 아니다. 어떤 비평이나 평론들을 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용어와 심리철학미학용어가 난무하여 그 뜻 조차 알수가 없다. 비평 하나 읽기 위해서 그 것을 다 공부해야 하는가? 사용한다 하더라도 제발 주석을 달아달란 말이다. 아니면 참고링크를 걸어두던지.
또 어떤 비평은 어설픈 자기 논리를 주장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 비평이 진리인듯 호도한다는 것이다.(겸손해져라) 내가 생각하는 비평은 작품을 제대로 읽고 여러가지 시각을 효율적으로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논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런 시각도 있는데 그 시각을 가지면 전혀 다르게 느낄수도 있다는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당신이 옳은 것이 아니다. 단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그걸 전부로 아는 지식인들이 비평하네 평론하네 하는게 눈꼴시어서 한마디 던져 본다.
그들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줄알고 있는게 분명하다. 요즘 이슈가 되는 부분에 있어서 관심을 별로 두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차라리 비평보다는 블로그를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시각들을 보는 것이 더 즐겁다.
물론 비평가나 평론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들의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우리 모습이 더 웃긴것일런지도 모르겟다. 모두가 비평가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다른 사람의 의견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단지 조금 다를뿐이다. 그것만 제대로 인식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적다보니 횡성수설이라 이만 줄임.
어쨌던 이 블로그는 이것 저것 내가 접한 것들에 대한 감상에 상상력을 가장한 망상을 더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며 친구에게 메일 보내듯이, 일기적듯이 사적인 메모를 하고 있다. 그래서 거의 반말체이기도 하다. ^^
얼핏 떠 올라서 징기스칸 영화 감상을 적다가 샛길로 새버렸다. ^^ 배보다 배꼽이 역시 더 큰 글이 되어버릴 것 같지만. 뭐 그래도 관계없다. 영화보고 상상하면서 이렇게 샛길로 새는 것도 내게는 소중한 느낌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