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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와 산다면 父と暮らせば The Face Of Jizo 2004
    Cinema/Japan 2007. 7. 15.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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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KA. Chichi to Kuraseba, The Face of Jizo.

    이 작품은 감독의 전쟁3부작 중 마지막 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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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ichi to Kuraseba in IMDB
  • 씨네21관련기사 .

  • 감독: 쿠로키 카즈오
    미츠에: 미야자와 리에宮沢りえ[각주:1]
    타케조: 하라다 요시오原田芳雄
    키노시타: 아사노 타다노부浅野忠信

    이 영화는 여러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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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일본인의 관점에서 원폭투하에 따른 그들의 피해의식과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환경적 인류애적 관점에서의 접근이고 이것은 아마도 감독이 의도하는 방향일 것이다.
    둘째. 그들의 관점이 아닌 이 영화를 보게 되는 일본의 침략행위에 의해 고통을 받았던 한국, 중국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보게 되는 경우이다.
    셋째는 위 두개의 경우에 다 적용될 수도 있는 관점인데 영화 그 자체에 대한 형식과 메시지를 보는 것이다. 즉 제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방법이다.

    아마 위의 관점들이 단순하게 하나만이 존재하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억지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면,

    원폭투하라는, 가장 비상식적이고 무책임한 인류의 재앙으로써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파멸병기의 사용에 따른 피해를 직접적으로 겪은 미츠에라는 23세 된 도서관 사서가 원폭투하 이후  겪게 되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아버지의 혼령을 통하여 치유해가면서 새로운 희망을 암시하고, 살아간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유지시키고 전승해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아버지와 딸의 대화를 통하여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참혹한 일이며, 앞으로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는 비극임을 상기시킨다. 
    미츠에는 원폭투하당시의 피폭자로 겉으로는 멀쩡해보이지만 3년 전부터 천둥과 번개에 엄청난 공포감을 가지게 되었고 발병의 위험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원폭희생자들에 대한 죄책감때문에 행복해져서는 안된다,사랑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미츠에가 항상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주는 정의의 용사나 마찬가지인 유령 혹은 미츠에의 환각이다. 두사람의 대화에 등장하는 키노시타는 원폭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미츠에가 호감을 느끼게 된다. 두 사람은  미츠에의 사랑이야기를 곁들여서 원폭이후의 경험과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원폭이 남긴 외형적 파괴만이 아니라, 붕괴된 도덕과 인간의 정신에 대해서 말이다. 이미 6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것을 잊지 말자는 의미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 폐허속의 꽃 한송이를 피우기 위해서는 희망과 믿음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내포하는 것일 것이다.

    위의 내용만 읽으면 환경친화적인 메시지와 인간의 희망은 사랑이며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의 위대함, 존재의 가치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더우기 하라다 요시오의 원맨쇼에 가까운 열연은 그 비극적 탄식에 동참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를 그렇게만 읽을 수가 없다. 분명히 첫번째 관점에서 느껴지는 것들에는 동의하지만, 그 이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원폭의 피해자는 분명히 히로시마 시민이다. 그렇다면 그 원폭을 초래한 전쟁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 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누구에게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는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탈을 당하고 살아왔다. 단지 그들의 야욕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나라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국가의 체제 또한 엉망이 된 채 지금까지 그 상처를 가지고있기도 하다. 그들이 겪었던 1~2초간의 12,000도의 열기와 방사능이,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수십년 세월에 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영화에서 미츠에와 타케조는 육체적 고통보다 그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와 죄책감등에 더욱 큰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진다. 물론 그 고통이 작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수십년간 겪어왔던 아픔에 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아니 무시하고 있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 최소한 전쟁의 이유와 왜 자신들이 패망했는지에 대한 암시정도는 있었어야 하지 않겠는가?  원폭투하를 초래한 것은 일본이다 비록 일본의 보통시민들이 초래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물론 전쟁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원폭의 비인간성과 참혹함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할 부분이 없기에 불쾌감을 떨칠수는 없었다. 예를 들자면  굶고 있는 거지 앞에서 배부르다고 징징거리는 놈을 보게되는 경우가 아닌가?  너네 원인은 확실히 알고 있는 거겠지라고 묻고 싶다. 뭐 그렇다고 해서 원폭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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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일견  한편의 연극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각주:2]
    히로시마라는 과거를 무대와 배경으로해서  대화만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다른 장면이 나오는 경우도 참조화면에 불과하다. 다 무너져가는 왠지 현실적이지 못한 세트같은 느낌의 폐가에 사는 딸과 그녀가 부르면 어디던지 나타나는 아버지 유령.  화요일 수요일.... 이런식으로 진행되는 형식은 연극의 구성과 다를바가 전혀 없다. 각 막은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이야기는 계속되어진다.

    하라다 요시오의 뛰어난 연기에 비해서 미야자와 리에의 상대적으로  부족한 연기가 조금 걸리긴 하지만 형식적인 면에서는 꽤 마음에 드는 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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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할 수 있는데 아버지가 사라지고 미츠에가 위를 올려다 본 이후의 장면들이다. 천정은 뼈대만이 존재하는 건물의 것으로 변해 있었고 그 사이를 통해서 하늘이 보이고, 카메라는 그 건물을 밖에서 훑듯이 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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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허속에 피어나는 한포기의 꽃을 비추고 정지한다. 이 엔딩이 마음에 든다는 것은 폐허속의 꽃이 가지는 의미 때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무대로 존재했던 미츠에의 집이 실은 히로시마였으며, 미츠에는 원폭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진 그 꽃의 의미를 간직한 보통사람들임을 말해주는 듯 해서이다. 

    이 영화는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꺼림칙할 수 밖에 없고 불쾌할 수 밖에 없는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독특한 형식과 하라다 요시오라는 배우의 열연을 볼 수 있었다는 것으로도 꽤 괜찮은 영화라고 느낀다.  어떤 식으로 느낄지는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편향적인 시각만으로 보기에 각각의 시각이 가지는 의미가 그렇게 가볍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아쉬운 영화이기도 하다.

    1. 미야자와 리에를 기억하는 것은 예전에 Santafe라는 누드화보집이 화제가 되었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위 링크의 씨네21관련기사를 통해 원래 2인극을 영화로 옮겼음을 알 수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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