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깊이에의 강요 - 파트릭 쥐스킨트
    Book 2007. 11. 12. 17:41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아주 싫어하는 편이다. 작품의 훌륭함 여부를 떠나 소통을 철저히 거부하는 독선적이기까지 한 어떤 편협함을 그의 책에서 느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느낀데에는 스스로가 가진 편협에 따른 자괴감이며 동질성에 따른 거부감일수도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만큼이나 철저히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작가 쥐스킨트의 작품을 다시는 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세상일이라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듯이 마음가짐과 실행 또한 바뀌게 마련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깊이에의 강요 - 8점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열린책들

    오늘 '깊이에의 강요'라는 짤막한 단편집을 손에 들고 말았다.
    "당신 작품에는 재능이 보이고 마음에도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위의 어구로 시작하고 유발되어지는 젊고 아름다웠던 예술가의 추하고 기이한 죽음을 다루고 있는 것이 깊이에의 강요라는 짧디 짧은 단편의 내용이다.

    영화를 보면서, 책을 읽으면서 은연중에 나 또한 깊이를 강요하며 또한 강요당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 깊이라는 것을 느끼는 기준은 위의 말마따나 지극히 개인적이며 배려없는 시선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지도.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모르겠지만, 우물의 깊이를 재는 것도 아닌 사람의 마음과 예술의 깊이에 척도를 들이민다는 것은 아마도 어불성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이란 것은 또한 현대에 있어서 순위를 매기고 가치를 측정하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여겨진다. 또 대부분 기준은 상업적이다. 설서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추상적이 아닐 뿐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촉망받던 예술가가 접한 짤막한 비평. 그로 인한 관계와 인식의 변화는 예술가를 폐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저 사람에게는 깊이가 없대라는 수군거림이 개인을 잠식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과연 깊이가 뭐길래? 그녀는 고립된다

    "나를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나는 깊이가 없어요!"

    그렇게 하나의 영혼은 깊이에 절망하여 추락하고 만다. 그제야 주목을 끌게 되는 예술가의 미스터리한 죽음. 그 단초가 되었던 비평가의 역시 짧은 비평으로 끝나버린다.

    ...전략...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중략....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과연 개인적인 걸까? 비평가는 자신이 간접살인을 저질렀음을 느끼기는 할까?
    그가 남긴 마지막의 비평에서 유추해본다면, 관심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 젊은 여류 예술가 의 죽음은 개인적인 것에 불과하며 그 무자비한 깊이에의 강요를 감내하지 못했다는 책임회피를 느낄수 있었다.

    물론 그 깊이에의 강요가 비평가 개인만의 몫은 아닐것이며, 모든 사회가 깊이를 강요하고 무언가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세상을 작가는 말하고 있으며 그러한 세상에 대한 깊은 불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들은 깊이를 강요하지만 정작 그 깊이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하다. 영화나 책을 보면서 좋은 점보다는 약점과 맹점을 찾아내려고 하며 그것을 통하여 어줍잖은 우월심리를 가지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인정한다 사유라기에도 부족한 느낌으로 단정짓고 오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비평을 한적을 한번도 없지만 감상에서 조차 악의에 찬 무책임한 말은 아닐까라는 반성과 감상 후기의 초벌감상을 무턱대고 포스팅하는 나 자신의 습관을 바꾸어야 할 때인지도 모르겟다.

    쥐스킨트의 편협함은 여전히 느껴지지만 깊이가 무언가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수용하는 사회와 개인 그 관계들에 대한 깊이있는 생각을 강요하는 단편소설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너무 짧다. 한 챕터가 끝이라니..

    두번째 단편인 승부는
    체스에서 무패를 자랑하는 비열한(?) 은퇴한 늙은 교수가 두는 마지막 게임을 다루고 있으며 깊이에의 강요와 그리 다르지 않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외양상 너무나 대조되는 젊고 패기넘치는 상대와의 대결, 주위의 어떤 열망과 기대를 충족시키는 듯한 체스의 행마... 그러나 승부는 가려지고 교수는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이 착각이었음을. 그들이 상정하고 부여한 가치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착각에 따른 상황의 오해와 실망 그리고 허탈함을 이끌어 낼 뿐인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런 경우를 가끔 보기도 한다. 빈 수레만 요란한 경우, 그 소리에 현혹되어 기대는 한껏 커지지만 정작 끌고 온 수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경우를 말이다. 분위기와 군중심리에 의해 잘못 부여 된 가치를 허망하게 깨닫고 모든 것이 의미 없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깊이에의 강요에서의 예술가가 승부에서의 잘생긴 젊은이만큼의 기대를 받게 되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가치의 부여 대상과 피부여 대상에서의 차이라는 점에서 대조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세번째 단편인 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평범한 사실에서 느끼는 경이로움과 고찰에 따른 집착 그리고 광기를 다루고 있다. 뭐 광기라고 하기엔 의미없을지도 모를 한 장인의 유언을 통하여 역시 가치와 깊이를 다루고 있다고 볼수도 있다. 남들에겐 의미가 없다 할지라도 내게는 생을 다하는 그날까지 절대적인 것들. 이렇게 어떤 가치라는것과 그 깊이는 남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도 부여하는 것이다. 비록 남들이 몰라주고 무관심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평범한 조개를 통한 세상을 바라보고 정의 내리면서 스스로 바스라져가는 조개껍질처럼 죽음을 맞이한 뮈사르의 죽음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허망한 것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그의 생각처럼 진정한 깊이에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에세이 “...그리고 하나의 고찰” 에서 다루는 '문학의 건망증'은
    어떤 깊이에의 가치 또한 의미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학을 통한 사유와 성찰이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라는 한 구절을 보면서, 그동인 자신이 이루었던 모든 가치가 사라졌음을, 건망증이라는 기억의 망각아래 스스로가 사라져버리는 정체성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 나 역시 이러한 부분에 시달리고 있기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상실에 따른 무력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꽤 여러개의 감상글을 남기고 그것을 통하여 감탄, 슬픔 등 다양한 이미지를 기록하지만 정작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 채 새로움을 느끼면서도 또 완전히 이전의 기억에서 자유롭지도 못한....그렇다면 내기 이전에 느꼈던 것을  깊이라 가정한다면  그것은 사라진 것일까? 독자의 입장에서 그러하다면 작가의 입장에서는 또 어떨까?


    쥐스킨트를 싫어하지만 그의 작품이 가치가 없으며 깊이가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단지 나와의 코드가 너무나 틀려서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욕지기를 느낀 적이 있고 비난하기도 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이 변화해나가면서 그러한 관점이 조금씩 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깊이에의 강요”라는 이 단편 모음집은 표현과 소재에 있어서 이전에 접했었던 향수, 좀머씨 이야기. 보다가 집어던졌던 비둘기, 그만 둔 콘트라베이스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여전히 개운찮은 느낌의 소통에 대한 거부가 걸리긴 하지만. 쥐스킨트의 기행을 통한 고독하고도 깊은 성찰의 산물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듯하다.

    내가 느끼기를 원하고 작품들에 요구하는 깊이라는 애매모호한 정의의 단어에 대해서 강요, 수용, 인식, 망각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한가지 가치또는 깊이를 망각하더라도 그로 인해 조금씩은 변화하는 스스로를 느낄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 지금의 생각이다. 좀 더 나은 방향으로에 변화를 바라기는 하지만 말이다. 글을 적다보니 쓸데 없이 길어지고 넋두리만 늘어놓은 듯 한데 개인적으로는 쥐스킨트의 작품 중 문학성이니 하는 것을 떠나서 가장 공감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비둘기를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Reference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