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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인의 삶 (The Lives Of Others, Das Leben Der Anderen, 2006)
    Cinema/Europe 2007. 5. 13.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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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타지(동독국가정보국)에 근무하는 대위 비즐러
    그는 냉정하며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며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다.

    그는 헴프장관이란 놈의 개인적인 욕구에서
    시작되어진 게오르그 드라이만이란 작가의
    도청감시 임무를 맡게 된다.

    게오르그 드라이만은 동독의 저명한 희곡가로써
    크리스타라는 배우와 동거중이며 요주의 인물들인
    예술가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을 감시하면서
    자신의 신념과 국가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되면서
    드라이먼과 크리스타를 은밀히 돕기 시작한다.
    드라이먼이 서독의 슈피겔지에 비밀리에
    기고한 동독 자살률에 대한 기사의 저자로
    의심받으면서 비즐러는 크리스타와 드라이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크리스타는
    죄책감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사망하며
    드라이먼은 크리스타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걸로
    생각하게 된다.

    4년여가 흐른 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의 장벽은 무너진다.
    비즐러는 드라이먼 감시임무 이후
    한직으로 쫓겨난 상태이다.

    또 몇년이 흐르고 드라이먼은
    진실을 알게 되면서
    비즐러-HGW XX/7에게 바치는 책을 저술하게 된다.

    참으로 스포일러 투성이인 줄거리는 이정도로 마친다.

    제목인 타인의 삶은 비즐러가 주로 맡고 있는
    감시임무와 심문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결과이다.
    그는 드라이먼에게서 몰래 가져온 브레히트의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스스로의 길을
    정해나가고 있다.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저절로 이끌려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지켜보고 또 행동하는 것들은
    아무도 모른다. 안다 하더라도 표현할 수 없다.
    그는 지금까지 단지 타인의삶을 알아내기
    위해서 존재해 왔다. 자기가 믿는 사실을
    이끌어내기 위한 기구로써 말이다.
    드라이먼을 통하여 그는 자신이라는 존재를
    찾아가게 된다.

    영화는 동독의 특수한 사정에 기초하고 있긴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에 있어서 대부분
    적용되는 것이다. 특히 대중예술이나 매체에 말이다.
    영화를 예로 들자면 우리는 대략적으로
    영화를 통하여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것이다.
    그 훙쳐본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도 있으며
    웃고 넘길 수도 있을 것이며 다양한 행위들이
    존재할 것이다. 비즐러가 한 선택은
    스스로 판단하기 힘들지만 또 결과적으로
    최선도 아니었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루어 낸
    자신의 한 걸음이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렇게 우리는 타인의 삶을 통하여
    여러방향으로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모두들 스스로 살아간다고 느끼지만
    결국은 그 자신도 타인에게 있어 타인으로
    존재하며 어떠한 형태의 소통인지를 떠나
    공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말이 또 어그러지기 시작하는데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비즐러는 드라이먼을 감시하고
    나는 비즐러를 감시하는
    결국 우리는 훔쳐보면 엿보면서
    살아가는 관음증 환자로써 존재하는 건 아닌가?
    극중에도 브레히트가 잠시 책으로써 언급되지만
    결코 비즐러에게도 드라이먼에게도
    몰입과 동화가 되지 않는 소외효과를 의미하는가?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캐릭터에 몰입되지는 않았지만
    영화의 내러티브와 전개에는 몰입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 감시와 은밀한 도움, 죄책감으로 인한 죽음들은
    나에게 '트루만 쇼' '빈집'과 엉뚱하게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잠깐 떠올리게끔 하기도 했었다.

    헴프장관인지 하는 넘과의 말미의 대화는
    꽤 많은 욕을 들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이런 엿같은 넘이 통독후에도
    활보를 하고 돌아다니다니 말이다.
    그게 아무리 영화적 도구로써 기능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건조한 화면과 더불어 흥미로운 소재.
    그러나 탁월하지는 않은 전개
    남들은 지루하다고들 하지만
    오히려 재미있게 보았다.

    난 보통 영화를 보면서 흥미가 떨어지면
    딴 생각을 화면서 멍하게 보기도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본 두편의 독일 영화는 꽤 만족.

    어제 우연히 영화 평론가 정성일과 황진미에 관한
    글들을 접했었다.
    내가 그사람들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글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지만
    정성일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황진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자신의 확실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게
    나와의 차이점인 것 같더라.
    (그런데 나는 비평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의 입장과 논점등을 약간 알게 된 지금에도
    그들의 효용성과 역할은 인정하지만
    비평이란 기생할 수 밖에 없다는
    전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이 인지하고 있기에 그들의 이야기도
    들을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아마도 절대 비평은 하지 않을 것이다.
    비평을 하기 싫다. 난 단지 나의 느낌과 감상을
    적을 뿐이다.

    트뤼포가 이야기 했다던가?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
    영화를 두번 보기
    영화에 대해 글을 적기
    영화를 만들어보기.
    대충 이정도로 기억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일단 저 기준에서 나는 영화를 조금은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다.

    아마 이런 부분이 아마도 남들이 나를 볼 수 있는
    타인의 삶이 아닐까? 전부를 알 수도 없으며
    알 필요도 없다. 단지 내가 보고 싶은 부분을
    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남들도 그렇다는 것을 인정할 때
    조금은 더 살기가 편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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